안 도트리슈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안 도트리슈는 스페인 왕 펠리페 3세와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리타의 딸로, 1601년 스페인 바야돌리드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프랑스 왕 루이 13세와의 정략결혼을 통해 프랑스 궁정 생활을 시작했지만, 불행한 결혼 생활과 정치적 갈등을 겪었다. 루이 13세와 23년 만에 아들 루이 14세를 낳았으며, 루이 13세 사후 섭정으로서 프랑스를 통치했다. 섭정 기간 동안 쥘 마자랭 추기경을 기용하여 프랑스의 국익을 증진하고, 프롱드의 난을 진압하는 등 정치적 안정을 이루었다. 이후 루이 14세의 친정이 시작되면서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으며, 1666년 유방암으로 사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나바라의 왕비 - 마르그리트 당굴렘
마르그리트 당굴렘은 프랑스 왕족이자 작가, 예술 후원가로서, 나바라 왕비가 되어 르네상스 시대 프랑스 문화 발전에 기여하고 종교 개혁에도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 나바라의 왕비 - 발루아의 마르그리트
발루아의 마르그리트는 앙리 2세와 카트린 드 메디치의 딸이자 프랑스 왕들의 여동생으로, 나바라의 앙리 드 부르봉과 결혼하여 종교 갈등 해소의 상징이 되었으나 성 바르텔레미 축일 학살로 불행을 겪었으며, "레인 마고"로서 문학과 예술에 영감을 주고 자서전으로 사회에 반향을 일으킨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 루이 13세 - 가스통 도를레앙 공작
가스통 도를레앙 공작은 프랑스 왕족으로, 형 루이 13세 치세에 반란과 음모를 일으키며 불안정한 행보를 보였고, 루이 13세 사후에는 프롱드의 난에 가담했으며, 두 번의 결혼으로 자녀를 두었고 조카 루이 14세 치세에는 '르 그랑 몽시외'로 불렸다. - 루이 13세 - 라로셸 공성전
라로셸 공성전은 1627년부터 1628년까지 루이 13세가 위그노 거점 도시 라로셸을 포위 공격하여 중앙 집권화를 강화하려 한 사건으로, 잉글랜드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라로셸 함락과 위그노의 특권 상실을 초래하며 프랑스 절대왕정 확립에 기여했고 《삼총사》의 배경이 되었다. - 프롱드의 난 관련자 - 루이 14세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 국왕인 루이 14세는 72년간 재위하며 절대 왕정을 강화하고 프랑스 문화의 황금기를 이룩했으나 잦은 전쟁과 사치스러운 생활로 국가 재정을 악화시키고 사회적 갈등을 심화시켜 절대 왕정의 전성기와 한계를 동시에 보여주었다. - 프롱드의 난 관련자 - 쥘 마자랭
쥘 마자랭은 이탈리아 출신으로 프랑스에서 활동하며 30년 전쟁 종식과 프랑스-스페인 전쟁 승리에 기여하고 프롱드의 난을 진압하여 루이 14세의 절대왕정 기반을 다진 추기경이자 정치가이다.
안 도트리슈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이름 | 안 도트리슈 |
전체 이름 | |
출생일 | 1601년 9월 22일 |
출생 장소 | 바야돌리드, 카스티야 왕관령, 베나벤테 궁전 |
사망일 | 1666년 1월 20일 (64세) |
사망 장소 | 파리, 프랑스 왕국 |
매장 장소 | 파리, 생드니 대성당 |
![]() | |
통치 | |
프랑스 왕비 | 재위: 1615년 11월 24일 – 1643년 5월 14일 배우자: 루이 13세 |
나바라 왕비 | 재위: 1615년 11월 24일 – 1620년 10월 20일 |
프랑스 왕국 섭정 | 재위: 1643년 5월 14일 – 1651년 9월 7일 군주: 루이 14세 |
가문 | |
가문 | 합스부르크 가문 |
아버지 | 펠리페 3세 |
어머니 |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리타 |
배우자 및 자녀 | |
자녀 | 루이 14세 필리프 1세 도를레앙 공작 |
2. 유년기
1601년 스페인 바야돌리드에서 출생하였다. 세례명은 '''아나 마리아 마우리시아'''(Ana Maria Mauricia)였다. 아버지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스페인 왕 펠리페 3세이며 어머니는 오스트리아의 카를 2세 대공의 딸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리타이다. 태어날 당시 호칭은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공주, 오스트리아의 여대공, 부르고뉴와 네덜란드의 공주'''(infanta of Spain and of Portugal, archduchess of Austria, princess of Burgundy and of the Low Countries)였다.
1611년, 아나는 10세 때 루이 13세와의 혼약이 성립되었다.[7] 이 결혼은 가톨릭 강국 프랑스와 스페인의 동맹 관계를 강화하는 전통에 따른 왕족 결혼이었다. 이 전통은 카토캉브레지 조약에 기초한 1559년의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와 프랑스 공주 엘리자베트 드 발루아의 결혼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안 도트리슈는 11살 때 프랑스 국왕 루이 13세와 약혼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50만 크라운과 많은 보석을 지참금으로 주었다. 루이 13세가 일찍 죽을 경우를 대비해 스페인 궁정은 안 도트리슈가 지참금, 보석, 옷을 가지고 스페인으로 돌아가도록 했다. 결혼 전 안나는 자신과 루이 사이에서 태어날 자손들의 상속권을 포기했지만, 자녀 없이 과부가 될 경우 권리를 회복할 수 있는 조항을 넣었다. 1615년 10월 18일, 루이와 안나는 부르고스에서, 루이의 누이 스페인 왕비 엘리자베트와 안나의 오빠 필립 4세는 보르도에서 각각 대리 결혼을 했다. 이 결혼들은 1559년 카토캉브레지 조약의 일부로 필립 2세와 발루아의 엘리자베트의 결혼으로 시작된 프랑스와 스페인 사이의 군사 및 정치 동맹을 강화하는 전통을 따랐다. 안나와 엘리자베트는 헨다이와 푸엔테라비아 사이의 꿩 섬에서 교환되었다.
바야돌리드의 베나벤테 궁전|Palacio de los Condes de Benaventees에서 태어난 그녀는 필리프 3세 국왕과 그의 아내 마가레타 오스트리아의 장녀였다.[7][8] 그녀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인판타(아버지가 스페인뿐 아니라 포르투갈의 왕이었기 때문)이자 오스트리아 대공녀의 칭호를 가지고 있었다. 스페인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오스트리아의 안나로 불렸는데, 그 이유는 스페인 통치자들이 합스부르크 가문의 장자 계열에 속했기 때문이다. 합스부르크 가문이라는 명칭은 19세기 이전에는 비교적 드물었다.
안나는 주로 마드리드 왕궁에서 자랐다. 왕족 공주로서는 이례적으로, 안나는 매우 종교적인 부모와 가까이서 자랐다. 그녀 또한 종교적으로 자라서 어린 시절 수도원을 자주 방문했다. 1611년, 그녀는 출산 중에 어머니를 잃었다. 슬픔에도 불구하고, 안나는 자신을 어머니처럼 따르던 어린 남매들을 돌보는 데 최선을 다했다.
3. 혼인 동맹
1615년 11월 24일, 아나는 부르고스에서 루이 13세와 대리 결혼식(신랑의 대리인과의 결혼식)을 올렸다.[31] 같은 날 루이 13세의 여동생 엘리자베트는 보르도에서 아나의 남동생인 왕세자 펠리페와 대리 결혼식을 올렸다. 프랑스와 스페인의 두 공주는 양국을 가르는 비다소아 강의 꿩 섬(프랑스의 엔다예와 스페인의 푸엔테라비아 사이)에서 교환되었다.
4. 프랑스 궁정생활
안나는 젊었을 때 활기차고 아름다웠으며, 승마 선수로도 유명했다. 그녀는 잘생긴 버킹엄 공작 조지 빌리어스를 포함하여 많은 숭배자들을 두고 있었지만, 그녀의 친한 사람들은 그들의 관계가 순결하게 유지되었다고 믿었다.
14살의 안나와 루이는 결혼 무효 가능성을 막기 위해 결혼을 성사시키라는 압력을 받았지만, 루이는 신부를 무시했다. 루이의 어머니인 마리 드 메디시는 며느리에게 존경심을 보이지 않고 프랑스 왕비로서 계속 행동했다. 이네스 드 라 토레를 중심으로 한 고귀한 스페인 시녀들로 둘러싸인 안나는 스페인 예절에 따라 생활했고 프랑스어를 향상시키지 못했다.
1617년, 루이는 총애자 샤를 달베르 드 뤼네와 함께 궁궐 쿠데타를 일으켜 어머니의 영향력을 제거하고 콘치노 콘치니를 암살했다. 뤼네는 루이와 왕비 사이의 거리를 좁히려 노력했다. 그는 스페인 시녀들을 내보내고 루이즈 마르게리트 드 로렌 공주와 그의 아내 마리 드 로앙 등 프랑스 시녀들로 대체했으며, 부부를 즐거운 환경에서 함께하게 할 궁정 행사를 조직했다. 안나는 프랑스식으로 옷을 입기 시작했고, 1619년 뤼네는 왕에게 왕비와 동침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그러나 일련의 유산은 왕을 실망시켰고 관계를 식혔다. 1622년 3월 14일, 안나는 시녀들과 놀던 중 넘어져 두 번째 유산을 겪었다. 루이는 그녀를 비난했고, 마리 드 로앙에게 화를 냈다.
루이는 리슐리외 추기경에게 의지했는데, 그는 1624년부터 1642년 사망할 때까지 그의 첫 번째 장관으로 일했다. 리슐리외의 대외 정책은 합스부르크 가문과의 투쟁이었기에, 이는 루이와 안나 사이에 긴장을 야기했다.
마리 드 로앙의 영향으로 왕비는 리슐리외에 대한 정치적 반대에 휘말리고 여러 음모에 연루되었다. 1626년 샬레 음모와 생크마르 백작 앙리 쿠아피에 드 뤼제 음모에 그녀가 개입했다는 소문이 궁정에 퍼졌다.
1635년 프랑스는 스페인에 선전포고하여 왕비를 곤경에 빠뜨렸다. 그녀는 오빠 필립 4세와의 비밀 서신 외에도 스페인 대사, 스페인 네덜란드 총독과도 서신을 주고받았다. 1637년, 안나는 너무 많은 의심을 받아 조사를 받았고, 결국 불법적인 서신에 참여했음을 인정했다. 이후 그녀의 서신은 검열받게 되었고, 허락 없이는 수녀원을 방문할 수 없었으며, 항상 시녀 중 한 명과 함께 있어야 했다.
4. 1. 불행한 결혼생활
루이 13세와 1615년 12월 25일에 결혼식을 올렸으나[32][33],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어린 남편 루이 13세와 모후 마리 드 메디시스의 관계가 매우 좋지 않았던 것이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시어머니 마리 드 메디시스는 차남 가스통을 편애하며 장남 루이 13세에게는 학대에 가까운 양육 방식으로 일관하였기에, 애정 결핍과 정서 불안에서 오는 심리적 장애를 안고 있던 루이 13세는 어머니를 증오하는 한편 어머니에 의해 강제된 정략결혼 자체를 굴욕으로 생각하였다.[34]
마리 드 메디시스는 1610년에 남편이자 프랑스 국왕인 앙리 4세가 암살당한 후 섭정을 맡아 권력을 장악하였다. 이후 그녀는 자신의 모국인 이탈리아 인을 중용하며 친 스페인 정책을 펼쳤다.[35] 그런 정책의 연장선상에서 루이 13세와 안 도트리슈의 정략결혼이 추진되었던 것이다. 어린 시절 루이 13세가 흠모하고 존경했던 부친 앙리 4세는 루이 13세의 결혼 상대로 프랑스 북동부 지역의 로렌 공작 가문을 염두에 두고 있었고, 이를 통해 과거 부르고뉴 공국이었던 지역에 대한 장악력을 확대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러한 선왕의 구상은 모후의 친 합스부르크 가문 정책으로 깨어지고 말았다.[34]
루이 13세의 분노는 안 도트리슈에 대한 미움으로 변했다. 마리 드 메디시스 역시 며느리를 위해 그 어떤 배려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안 도트리슈는 거의 무시당하고 방치되다시피 했으며 프랑스어를 제대로 익히지 못하는 등 프랑스 궁정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열네 살인 안나와 루이는 미래의 결혼 무효 가능성을 막기 위해 결혼을 성사시키라는 압력을 받았지만, 루이는 신부를 무시했다. 루이의 어머니인 마리 드 메디시스는 며느리에게 어떤 존경심도 보이지 않고 프랑스 왕비로서 계속 행동했다. 이네스 드 라 토레를 중심으로 한 고귀한 스페인 시녀들로 둘러싸인 안나는 스페인 예절에 따라 생활했고 프랑스어를 향상시키지 못했다.
1617년 루이는 총애자 샤를 달베르 드 뤼네와 함께 궁궐 쿠데타를 일으켜 어머니의 영향력을 제거하기로 하고, 그해 4월 26일 콘치노 콘치니를 암살했다. 뤼네는 루이와 왕비 사이의 형식적인 거리를 해소하려고 시도했다. 그는 이네스 드 라 토레와 다른 스페인 시녀들을 내보내고 루이즈 마르게리트 드 로렌 공주와 그의 아내 마리 드 로앙과 같이 프랑스 시녀들로 대체했고, 부부를 즐거운 환경에서 함께하게 할 궁정 행사를 조직했다. 안나는 프랑스식으로 옷을 입기 시작했고, 1619년 뤼네는 왕에게 왕비와 동침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루이가 왕비의 심각한 병 동안 주의가 산만해졌다는 사실에서 어느정도 애정이 싹텄음을 알 수 있다.
일련의 유산은 왕을 실망시켰고 관계를 식히는 역할을 했다. 1622년 3월 14일, 시녀들과 놀던 중 안나는 넘어져 두 번째 유산을 겪었다. 루이는 그녀를 그 사건의 책임자로 비난했고, 태만으로 여겨지는 행동을 부추긴 마리 드 로앙에게 화를 냈다.
루이는 리슐리외 추기경에게 의지하게 되었는데, 그는 1624년부터 1642년 사망할 때까지 그의 첫 번째 장관으로 일했다. 프랑스를 양면에서 포위한 합스부르크 가문과의 투쟁이라는 리슐리외의 대외 정책은 16년 동안이나 자녀가 없었던 루이와 안나 사이에 긴장을 야기했다.
마리 드 로앙의 영향 아래 왕비는 리슐리외에 대한 정치적 반대에 휘말리고 그의 정책에 반대하는 여러 음모에 연루되었다. 마리가 1626년에 조직한 샬레 음모와 리슐리외가 왕에게 소개한 왕의 배신적인 총애자 생크마르 백작 앙리 쿠아피에 드 뤼제의 음모에 그녀가 개입했다는 소문이 궁정에 퍼졌다.
1635년 프랑스는 스페인에 선전포고하여 왕비를 곤경에 빠뜨렸다. 그녀의 오빠 필립 4세와의 비밀 서신은 그녀가 스페인과 주고받은 유일한 연락이 아니었다.
4. 2. 쿠데타 이후
1617년 루이 13세는 어머니 마리 드 메디시스의 섭정과 총신 콘치노 콘치니를 몰아내는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되찾았다.[35] 이 쿠데타에 가담하여 재상이 된 뤼네 공작 샤를 달베르는 국왕 부부의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했다. 그는 안 도트리슈 궁정의 스페인 출신 시녀들을 내보내고, 콩티 왕자비, 뤼네 공작 부인 마리 드 로앙몽바종 등 프랑스 출신으로 대체했다. 또한 궁정 이벤트를 통해 부드러운 분위기를 조성했다. 안 도트리슈도 프랑스어를 다시 익히는 등 노력하여, 한동안 부부 관계는 크게 호전되었다.
4. 3. 반복되는 유산
1622년 3월 14일, 안 도트리슈가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두 번째 유산을 하자 루이 13세는 아내와 시녀 뤼네 공작 부인에게 왕비를 태만하게 모셨다는 이유로 화를 냈다.[8] 왕은 뤼네 공작 부인이 왕비에게 미치는 영향력에 불쾌해했고, 1621년 뤼네 공작이 죽으면서 상황은 더 심각해졌다. 안 도트리슈는 1622년 슈브르즈 공작 부인이 슈브뢰즈 공작과 재혼하는 것을 보호해 주었다.
1619년과 1621년에 왕비가 계속해서 유산을 하자 국왕이 실망하면서, 다시 관계가 악화되었다. 1622년 3월 14일, 시녀들과 놀던 안느가 계단에서 떨어져 세 번째 유산을 하자, 루이 13세는 왕비를 비난했고, 뤼네 공작 부인에게 격분하여 부인을 궁정에서 추방했다. 뤼네 공작은 1621년 12월에 이미 사망했다. 그 후, 루이 13세는 프로테스탄트와의 내전에 집중했고, 왕비는 친구가 된 미망인 뤼이느 공작 부인과 슈브르즈 공작 클로드와의 재혼을 지지했다.
4. 4. 갈등과 음모
루이 13세는 뤼네 공작이 사망한 후, 모후의 총신이었다가 왕의 편으로 돌아선 리슐리외 추기경을 재상이자 조언자로 총애하였다. 리슐리외 추기경의 외교 정책은 안 도트리슈의 가문인 합스부르크 왕가가 통치하는 스페인과 오스트리아를 적대시하는 정책이었기에 두 사람 사이는 항상 긴장이 감돌았다.[36] 그러나 두 번째 유산 이후 6년여 간 후사를 낳지 못했던 안 도트리슈는 리슐리외 추기경에 대한 왕의 총애까지 더해져 항상 열세에 몰렸다.
친구 슈브뢰즈 공작 부인 (마리 드 로앙-몽바종)의 영향으로, 안 도트리슈는 공공연하게 리슐리외 추기경의 정적(政敵)으로 자리잡았으며 동시에 각종 음모에 휘말렸다. 그 중에서도 샬레 백작과 슈브뢰즈, 그리고 루이 13세의 남자 연인으로 리슐리외 추기경에 의해 등용되었던 생 마르스가 개입했던 1626년의 공모는 왕비 또한 개입했음이 확실한 음모 중 하나이다.
1635년부터 시작된 프랑스와 왕비의 모국 스페인과의 전쟁(프랑스-스페인 전쟁 (1635-1659))이 점차 심화되면서, 안 도트리슈는 동생인 스페인 왕 펠리페 4세와 비밀리에 교섭하면서 은밀히 프랑스 내의 각종 기밀을 빼내어 주곤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반역 행위는 1637년 리슐리외 추기경에게 발각되어 결국 슈브뢰즈는 궁정에서 추방되고 왕비는 남편인 왕의 총애를 완전히 잃은 채 반 감금 상태에서 감시를 받으며 지내게 되었다.[36] 이 즈음 두 부부의 관계는 최악이었고, 진심으로 서로를 미워하고 있었다.[36]
5. 후계자의 탄생
결혼한 지 23년 만에 왕비가 임신하자, 프랑스 내에서는 아이의 출생에 대한 비밀스러운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두 부부는 왕비를 경계하면서도 왕실의 후손을 낳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리슐리외의 중재로 공식적으로 화해했고, 임신 이전에 두 번 동침한 기록이 남아있다.[32][37] 1638년 9월 5일, 안 도트리슈는 왕자 루이 14세를 낳았다.
라 가제트프랑스어는 왕실 부부가 1637년 11월 9일부터 12월 1일까지 생제르맹앙레 샤토에 머물렀다고 기록했다. 왕비의 주치의인 샤를 부바르는 그녀의 임신이 11월 말에 시작되었다고 계산했다.[19] 루이 14세는 1638년 9월 5일에 태어나 부르봉 왕가의 계승을 확보했다. 당시 안의 나이는 37세였다. 공식 신문인 가제트 드 프랑스프랑스어는 이 출생을 "전혀 예상치 못했던 기적"이라고 불렀다.
1640년에는 둘째 아들인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가 태어났다. 그러나 안 도트리슈는 여전히 프랑스보다 스페인의 국익을 우선시하여 남편의 의심을 샀고, 루이 13세 또한 냉담한 태도를 유지하여 두 사람의 관계는 더 이상 가까워지지 못했다.
6. 프랑스의 섭정
루이 13세는 1643년 사망 직전에 안 도트리슈가 어린 아들 루이 14세의 섭정이 되는 것을 금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하지만 루이 13세가 사망하자 그의 유언은 파리 고등법원에서 피에르 세기에 대법관에 의해 폐기되고 안 도트리슈는 왕국의 섭정이 되었다.[38]
안 도트리슈는 아들 루이 14세가 왕위에 오르자 아들의 왕국에 대한 국익을 더 생각하여 이전의 친 스페인 정책을 버렸다. 그녀는 쥘 마자랭 추기경을 기용하여 30년 전쟁 후 진행된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프랑스가 많은 이익을 얻도록 하였고, 프롱드의 난 등으로 혼란스러웠던 정국을 비교적 잘 헤쳐나갔다.[39] 안 도트리슈의 총애가 워낙 깊었던 탓에 마자랭 추기경을 안 도트리슈의 비밀 남편으로 여기기도 한다.
1643년 루이 13세가 사망하자, 안 도트리슈는 피에르 세귀에의 도움을 받아 파리 고등법원에 그의 유언을 무효화하도록 했는데, 이 유언은 그녀의 권력을 제한하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안 도트리슈는 섭정으로 임명되었다.[20]
마자랭의 지원을 받아 안 도트리슈는 콩데 공 루이 2세가 이끄는 귀족 반란인 프롱드를 진압했다. 1651년 아들 루이 14세가 공식적으로 성년이 되면서 그녀의 섭정은 법적으로 종식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마자랭이 사망할 때까지 아들 루이 14세에게 상당한 권력과 영향력을 유지했다.
1648년 1월, 섭정으로 재임 중이던 안 도트리슈는 왕실이나 귀족과 관련된 예술가들의 요청을 받았다. 샤를르 르 브룅이 이끄는 예술가들은 예술가들에게 벌금을 부과하거나 작품을 압수했던 길드의 독점적 통제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화가들과 조각가들은 루이 14세와 섭정 왕비에게 새로운 조직을 설립해 줄 것을 청원했다. 그들은 프랑스 아카데미가 프랑스 문학에 해당하는 것처럼 시각 예술을 위한 아카데미를 설립하고자 했는데, 이것이 바로 왕립 아카데미가 된 것이다.
7. 말년
1651년 루이 14세의 친정이 시작되면서 안 도트리슈는 공식적으로 섭정 자리에서 물러났으나, 이후에도 계속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1659년 스페인과의 전쟁이 피레네 조약으로 종결된 후, 평화 조약의 일환으로 정략결혼을 추진하였다.[40] 그 결과 1660년 6월 9일에 자신의 조카이자 펠리페 4세의 딸인 마리 테레사 공주와 22살이 된 아들 루이 14세를 결혼시키는 데 성공했다.[41]
1661년 마자랭 추기경이 사망하고 같은 해에 안 도트리슈의 첫 손자인 루이가 태어났다. 이후 많은 아이들이 태어났지만, 루이를 제외한 합법적인 계승자들은 모두 사망했다. 안 도트리슈는 발 드 그라스로 은퇴하여 유방암으로 1666년에 사망하였다.
안 도트리슈의 사후, 그녀의 궁정 시녀였던 마담 드 모트빌은 그녀에 대한 회고록 ''Mémoires d'Anne d'Autriche''를 남겼다.
8. 평가
안 도트리슈는 숱이 많고 밝은 밤색 머리칼, 반짝이는 흰 피부, 녹색빛이 도는 다갈색 눈을 가진 매력적인 여성이었다. 귀족적인 자태와 품위를 지녔으며, 특히 희고 긴 손이 아름다워 '유럽에서 가장 손이 아름다운 여인'으로 불렸다.[42] 알렉상드르 뒤마는 1844년에 쓴 소설 '삼총사'에서 키가 크고 아름다운 왕비였던 그녀를 주인공으로 삼았다.[43]
프랑스 왕 루이 13세의 왕비로서, 왕의 유언을 어기고 섭정을 하였으나 재상 마자랭과 프롱드의 난을 극복하고 루이 14세의 절대왕정의 기반을 다졌다는 평가를 받는다.[32]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 《삼총사》(1844), 《20년 후》(1845), 《브라젤론 백작》(1847–1850)에서 중심 인물 중 한 명으로 등장하며, 수많은 영화에서 그녀를 묘사했다. 그녀의 시녀였던 마담 드 모트빌은 《안 도트리슈 회고록》에서 왕비의 삶을 기록했다.
안 도트리슈를 연기한 배우
배우 | 작품 | 연도 |
---|---|---|
제럴딘 채플린 | 삼총사, 사총사 | 1973, 1974 |
콜레트 에마뉘엘 | 춤추는 왕 | 2000 |
알렉산드라 다울링 | 뮤즈케터스 | 2014–2016 |
리베카 로버츠 | 내일의 전설 | 2016 |
예심 체일란 | 마치 | 2017 |
비키 크립스 | 삼총사: 달타냥, 삼총사: 밀레이디 | 2023 |
다이너소어 킹 2기 "프랑스의 격분" 에피소드에서 어린 루이 14세와 함께 십대 소녀로 등장하기도 했다. 베르사유 시즌 1 에피소드 1에 카메오로 출연했다.
참조
[1]
BLKO
[2]
BLKO
[3]
CathEncy
[4]
BLKO
[5]
BLKO
[6]
BLKO
[7]
서적
세계의 역사17 유럽 근세의 개화
[8]
서적
성스러운 왕권 부르봉가
[9]
서적
합스부르크의 여자들
[10]
서적
세계의 역사8 절대 군주와 인민
[11]
서적
합스부르크의 여자들
[12]
서적
성스러운 왕권 부르봉가
[13]
서적
합스부르크의 여자들
[14]
서적
합스부르크의 여자들
[15]
서적
도설 잉글랜드 해군의 역사
[16]
서적
성스러운 왕권 부르봉가
[17]
서적
합스부르크의 여자들
[18]
서적
세계의 역사8 절대 군주와 인민
[19]
서적
루이 14세 프랑스 절대왕정의 허실
[20]
서적
성스러운 왕권 부르봉가
[21]
서적
성스러운 왕권 부르봉가
[22]
서적
세계의 역사8 절대주의의 성쇠
[23]
서적
세계의 역사8 절대 군주와 인민
[24]
서적
루이 14세 프랑스 절대왕정의 허실
[25]
서적
세계의 역사17 유럽 근세의 개화
[26]
서적
세계의 역사8 절대주의의 성쇠
[27]
서적
세계의 역사8 절대 군주와 인민
[28]
서적
세계의 역사8 절대주의의 성쇠
[29]
서적
루이 14세 프랑스 절대왕정의 허실
[30]
웹사이트
마자랭의 명성과 성격
http://premium.brita[...]
2015-10-30
[31]
서적
The Married Life of Anne of Austria: Queen of France, Mother of Louis Xiv
[32]
백과사전
안 도트리슈
두산백과
[33]
백과사전
왕비 안 도트리시
프랑스 왕과 왕비
2006-08-10
[34]
백과사전
루이 13세 [Louis XIII] - 절대주의를 향하여
https://terms.naver.[...]
프랑스 왕가
[35]
서적
이야기 프랑스사
청아출판사
2005-12-10
[36]
백과사전
안 도트리슈
두산백과
[37]
서적
이야기 프랑스사
청아출판사
2005-12-10
[38]
백과사전
왕비 안 도트리시
프랑스 왕과 왕비
2006-08-10
[39]
서적
이야기 프랑스사
청아출판사
2005-12-10
[40]
서적
이야기 프랑스사
청아출판사
2005-12-10
[41]
백과사전
루이 14세 [Louis XIV] - 프랑스의 영광을 이룬 절대군주
프랑스 왕가
[42]
백과사전
안 도트리슈
두산백과
[43]
백과사전
왕비 안 도트리시
프랑스 왕과 왕비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